이란 중도 실용주의자 “지금이 종전 기회”…美·이란 모두에 ‘협상 메시지’

해외

이데일리,

2026년 4월 04일, 오후 04:09

[뉴욕=이데일리 김상윤 특파원] 이란의 대표적 중도·실용주의 외교 인사로 평가받는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전 외교장관이 전쟁 장기화 속에서 미국과 이란 양측을 동시에 겨냥한 ‘이중 메시지’를 던졌다. 협상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구체적 조건과 논리를 제시해, 단순한 의견을 넘어 사실상 협상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된다.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전 외교장관 (사진=AFP)
자리프전 장관은 3일(현지시간)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올린 ‘이란은 어떻게 전쟁을 끝내야 하는가: 테헤란이 수용 가능한 합의안’ 기고문에서 “이란은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 전략적 우위를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대규모 공습을 통해 이란 정권 붕괴를 시도했지만 실패했으며, 오히려 출구 전략 없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고 평가했다. 지도부가 암살에도 불구하고 체제를 유지했고, 군사·산업 시설이 공격받는 상황에서도 지속적으로 반격에 나섰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이란이 역사적인 저항을 이뤄낸 것”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전쟁 지속에 대해서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자리프 전 장관는 “일부에서는 공격자들을 충분히 처벌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이는 심리적으로는 만족스러울 수 있어도 현실적으로는 더 큰 파괴를 초래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민간인 피해와 핵심 인프라 파괴가 계속 확대되고 있고, 분쟁이 지역을 넘어 세계적 충돌로 번질 위험도 커지고 있다”며 장기전의 비용을 강조했다.

아울러 “지금의 군사적 성과를 바탕으로 승리를 선언하고 협상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전쟁 지속보다 외교적 해법을 택할 것을 촉구했다. 최근 이란 내에서 ‘항전 지속’과 ‘보복 강화’ 여론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이를 자제시키고 협상 국면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동시에 그는 미국을 향해서도 구체적인 협상 신호를 보냈다. 자리프 전 장관은 미국이 제재 해제와 군사적 긴장 완화를 선택할 경우, 이란도 핵 프로그램 제한과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 등 상응 조치에 나설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협상 조건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란은 핵무기를 추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하고, 농축 우라늄을 일정 수준 이하로 낮추며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상시 감시를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은 유엔 안보리 결의와 독자 제재를 해제하고, 이란이 글로벌 경제와 공급망에 정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호르무즈 해협 문제를 핵심 협상 카드로 제시했다. 자리프 전 장관는 이란이 오만과 협력해 해협의 안전한 통항을 보장할 수 있다고 밝히면서도, 동시에 미국이 이란의 원유 수출을 제한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해협 재개방과 제재 완화를 맞교환하는 구조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더 나아가 그는 양국 간 상호 불가침 협정 체결, 외교 관계 복원, 경제·기술 협력 확대 등도 포함될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 기업의 이란 에너지 산업 참여와 전쟁 피해 복구를 위한 재정 지원까지 언급하면서, 단순한 휴전이 아닌 포괄적 평화 협정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자리프 전 장관는 단순한 휴전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휴전은 가장 쉬운 선택이지만 근본적인 갈등을 해결하지 못해 언제든 충돌이 재개될 수 있다”며 “이번 전쟁을 계기로 수십 년간 지속된 적대 관계를 끝낼 포괄적 합의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번 전쟁이 양측 모두에 현실을 깨닫게 했다고 평가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함께 군사력을 동원했음에도 이란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제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군사적 해법의 한계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란 역시 핵 기술이 완전한 억지력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동 지역 질서에 대한 평가도 담겼다. 자리프 전 장관는 아랍 국가들이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는 전략이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동맹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란을 공격했고, 그 결과 해당 국가들이 전쟁의 무대가 됐다는 것이다. 이는 향후 지역 차원의 새로운 안보 협력 체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 대목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향한 메시지도 포함됐다. 자리프 전 장관는 트럼프의 발언을 “모순되고 혼란스럽다”고 평가하면서도, 미국이 처한 정치·경제적 부담을 협상 가능성의 근거로 제시했다. 특히 미국의 군사 행동이 에너지 가격 상승을 초래했고, 이는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리프 전 장관는 하산 로하니 정부에서 외교장관을 지내며 2015년 이란 핵합의(JCPOA)를 이끌었던 핵심 협상가다. 유엔 주재 대사를 역임하는 등 서방과의 외교 최전선에서 활동해 왔으며, 이란 내에서는 협상과 제재 완화를 중시하는 중도·실용 노선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현재 공식 직책은 없지만 국제 외교 네트워크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번 기고는 한쪽만을 향한 메시지가 아니라, 미국과 이란 양측 모두에 ‘지금이 전략 전환의 시점’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란에는 전쟁 확대 자제를, 미국에는 출구 전략 마련을 촉구하는 동시에, 양측이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협상 틀까지 제시했다는 점에서 향후 협상 국면 전환 여부를 가늠할 중요한 신호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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